조카가 태어나고
요즘 오빠 가족을 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오빠는 연애와 결혼, 육아기간을 합쳐도 5년 정도 될까한다. 분명 나와 남자친구의 연애 기간은 벌써 만으로 7년이 넘어갔는데 같은 공간에 산다는 것, 경제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 함께 책임질, 서로와 서로의 모습을 반반씩 닮은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 그 과정이 가져오는 밀도는 사뭇 다르다.
주변 사람들과 법적으로 가족으로 공인받은 그들은 더이상 성격이 맞지 않다고, 어느 한 부분이 꼴뵈기 싫다고 "헤어질까" 하는 고민을 10번 중 1번만 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할까?
커가는 조카를 보면서 아이를 낳는 다는 것에 대한 의미도 되짚게 된다.
조카를 보면 정말 예쁘고 사랑스럽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존재가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다가 서서히 기어다니기 시작하고, 걸음마를 하고 뛰기까지 한다. 지금은 말을 배우고 있어 나에게도 "꼬모"라고 어설픈 발음을 선보이곤 한다.
고모인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부모는 오죽할까. 조카가 없는 세상은 이제 나에게도 받아드리기 힘들다. 마치 조카를 낳기 전 오빠의 모든 선택들이 조카를 낳기 위한 선택으로 정당화 되는 것 아닐까? 오빠가 첫 취업때 고민했던 두 기업이 있다. 물론 선택하지 않았던 기업이 연봉도 조건도 좋았지만 지방에 있어 오빠는 서울에 있는 기업을 택했다. 오빠가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면 언니를 못만났겠지. 오빠가 그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성당을 다니지 않았다면. 오빠의 모든 선택이 조카를 태어나기 위한 선택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모든 선택은 옳았다. 몇 십년전의 일부터 어제의 일까지 후회로 가득차 있는 나도, 아이를 낳는다면 그 모든 후회들을 받아드리고 사랑할 수 있을까?
결혼을 한다는 것, 아이를 낳는다는 것, 35살이나 먹었지만 아직 내 삶에 이 두 가지를 상상하는게 잘 되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드려지는 환경이라 미혼으로 산다는게 도전적인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외부적 요인들을 배제하고 나만 두고 생각했을 때 미혼이라는 현재 상황을 변화없이 유지하는 게 정말 도전적인 일이였을까? 사실 나는 오히려 내 삶의 변화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카가 태어난 이후, 내가 가보지 않은 삶을 옆에서 슬쩍 맛보면서 견고했던 마음에도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결혼하고 맘에 안들면 그때 이혼하면 낫지 않나? 라는 가벼운 마음이 생기다가도 누군가를 만나 평생을 기약하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여전하다.
두서없이 적었지만 이 이야기의 결론은 심플하다. 조카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것